노성태의 남도 역사기행 - 조선 성리학 6대가, 노사 기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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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조선 팔도를 평가하면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하여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 라고 장성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흥선대원군의 장성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전적으로 노사 기정진의 학문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노사 기정진의 학문의 깊이를 알려주는 다음의 일화가 유명하다. 어느 해 청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와 조선의 학문을 시험하기 위해 '용단호장 오경루하석양홍(龍短虎長 五更樓下夕陽紅)'이라는 글귀를 내놓고, 이에 대구(對句)를 맞추라는 문제를 낸다. '용단호장'은 직역하면 '용은 짧고 호랑이는 길다' 라는 뜻이고 '오경누하석양홍'은 '깊은 밤중 누각 아래 석양빛이 붉다'라는 뜻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에 대신들은 대구하지 못하고 쩔쩔맨다. 할 수 없어 사람을 보내 장성의 노사에게 뜻을 묻는다.
노사는 문제를 한참 들여다보고 난 뒤 두 글은 모두 해(日)를 주제로 표현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즉 겨울철에는 해가 용을 상징하는 진시(辰時, 아침 7시 정도)에 떠오르므로 해의 길이가 짧고, 여름철에는 해가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시(寅時, 아침 5시 정도)에 떠오르므로 해의 길이가 길다는 뜻이며, 오경루는 중국에 있는 누각으로 석양의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동해유어 무두무미무척 화원서방 구월산중 춘초록(東海有魚 無頭無尾無脊 畵圓書方 九月山中 春草綠)" 이라고 대구한다. 풀이하면 이렇다. "동해에 떠오르는 해는 고기와 같은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등지러미도 없다.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씨로 쓰자면 각이 졌다(日자의 암시). 중국은 오경루에 지는 석양이지만 조선은 구월산에 새로 돋아나는 봄풀이다" 라고 명쾌하게 답한다.
이에 청 사신은 천재적인 해석과 답에 감탄했고, 철종도 노사의 지식에 탄복하여 '장안만목 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의 만개의 눈이 장성의 눈 하나만 못하다'는 칭송에 나오는 '장성일목'은 당시 안질로 한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된 노사를 가리킨다.
●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다
서울 만개의 눈을 이겨버린 애꾸눈 기정진(奇正鎭, 1798~1879), 그는 179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자란다. 본관은 행주, 호는 노사(蘆沙)다. 5세 때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고, 10세 때에 이미 경서와 사서에 통달한다. 유학에 전념하여 34세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강릉참봉에서 동부승지ㆍ호조참의ㆍ공조참판 등 40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6일간만 봉직하고 사양한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한다. 46세에 '납량사의(納凉私議)', 48세에 '정자설(定字說)', 56세에 '이통설(理通說)' 그리고 81세에 그가 평생 연구한 이기론을 정리한 '외필(猥筆)'을 저술한다.
'납량사의'와 '외필'은 그의 이(理)에 대한 철학사상의 핵심 저서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ㆍ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일(理一)과 이분(理分)은 서로 완전히 용납되는 관계이므로 이와 분은 대치하여 서로 막히는 것이 아니지만, 이의 존(尊)은 무대(無對)하기 때문에 기와 짝할 수 없고, 기는 이에 순종하여 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의 실행은 곧 이의 실행이라고 주장한다. 기보다는 이를 절대시한 유리론(唯理論)의 주창이다. 성리학에 일가를 이룬 그는 서경덕ㆍ이황ㆍ이이ㆍ이진상ㆍ임성주와 함께 조선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진다.
장성군 진원면에 그를 기린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다. 고산서원은 원래 노사가 정사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이름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었다. 1924년 후손들이 중건하여 1927년 고산서원이라 편액을 걸었다.
●'병인소'를 쓰다
초야에 묻혀 강학과 저술에만 몰두했지만 농민의 궁핍한 삶에 대해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임술년(1862)에 진주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 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역설한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임술의책(壬戌擬策)'이다. 그는 임술의책에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이유를 '농민들이 먹을 젖이 없어 우는 소리'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임술 농민 항쟁의 원인을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보고 그 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역설한다.
나라 일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했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나자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해 상소를 올린다.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쓴 6개 조항의 상소문인 '병인소(丙寅疏)'가 그것이다. 6000여자로 된 장문의 상소문은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 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뒤에 나타나는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출처 : 구름에 달가듯 가는 최삿갓
글쓴이 : 삿 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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